공간을 만드는 행위가 건축이라면 그 공간을 점유하는 인간과의 상호 작용을 빼놓고 건축을 말할 수 없다. 공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매개체들 간의 작용(EVENTS)들을 어느 정도 예상하며 디자인하는 것은 건축 공부를 한 이라면 알고 있는 개념일 것이다. 그리고 사용하는 사람까지 모두 포함시키는 것이 건축이라면 이 행위는 고상한 건축가들만으로 완성될 수 없다는 말과 같지 않을까? 비약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건물주를 포함한 일반 사람들의 문화적 수준이 곧 그 나라의 건축(공간)수준이라고 생각한다. 국민들의 문화적 소양이 높은데 건축(공간)문화 수준이 낮은 곳은 없고 세계적으로 명망있는 건축가들을 많이 배출한 국가의 시민들이 건축가들을 대하는 태도에는 존경이 뭍어난다.
'공간의 수준'이라는 말에 대해 잠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공간의 수준이라는 개념은 비싼 돈을 들여서 화려하게 건물과 도시를 치장해가는 이미지와는 다르다. 나는 공간의 수준이라는 개념을 이렇게 정의한다. 자본의 논리와 효율성이라는 강력한 시대정신을 역행하여 진실로 인간을 배려하는 사회적 합의가 얼마만큼 구현되었는가? 그런데, 애석하게도 작금의 우리 사회를 되돌아 보건데 한국에서 양질의 공간을 뽑아내기는 몹시도 어려운 일처럼 보인다.
건물을 지어서 수 억원의 이득을 볼 수 상황 속에서 일부를 공익을 위해 내 놓아야 하는 상황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내 놓는다는 표현은 자본가 입장에서의 뉘앙스이고 공공을 위한 방향성과 개인의 이득을 위한 방법 사이의 대치라고 달리 얘기해보자. 사실 이런 경우는 순차적으로 벌어지기 보다는 설계 단계부터 준공이 될 때까지 심지어 건물을 다 짓고나서도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또한 기부채납이나 공개공지와 같이 흔히 알고 있는 제약 뿐 만 아니라 공용 공간의 비율과 화장실의 규모와 형태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무척 다양하다. 자본과 공익의 대립은 어쩌면 흔한 클리쉐이지만 공간(건축, 도시)디자인에서도 매우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처럼 공간의 수준을 높이는 방법 대부분이 투자를 하여 이득을 내는 등식과 반대 방향에 놓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이를 개인이 쉽게 허용할 리가 없다. 내 돈을 사회에 내 놓으라니! 자본주의 체제 그 어떤 국가에서도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허용의 정도가 차이나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이 차이가 결국 그 나라의 공간(건축, 도시)수준을 결정 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결국 건축, 도시에 걸친 공간 문화 산업이 얼마나 자본주의에 잠식되어 있는지가 중요하다.
우리나라만큼 온 국민이 부동산 투자에 매몰되어 있는 나라는 없다. 이는 단언코 확실하다. 공인중개사 사무소의 엄청난 숫자가 이를 방증한다. 한국인 삶의 화두가 부동산일지니 광풍은 도무지 사그러들 줄 모른다. 이렇다보니 건축물은 곧 부동산의 투자 대상이고 건물 한 평이 곧 내 피와 같은 돈에 불과하다. 부의 축적이 곧 인생의 목표가 되어버렸기에 건물과 도시는 단지 화폐로서 계량될 수 있는 수단 일 뿐이다. 이게 곧 공간에 대한 우리의 가치관이 되어버렸다. 만약 이를 정량화 할 수 있다면 공간 산업의 자본주의 잠식도는 전 세계에서도 일 위를 차지하고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어쩌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토록 부동산에 매몰되어 버렸을까? 부동산을 통해서 큰 돈을 만질 수 있는 판이 짜여지도록 유도한 정부의 방관과 부추김이 가장 큰 원인이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통한 주택 사업은 90년대에 멈췄어야 했다. 큰 돈을 단기간에 만질 수 있는 좋은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공간 산업의 양태는 마치 도파민 중독과 같다. 더 강력한 자극만 찾는 이들에게 양질의 공공 공간이 우리 삶에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설명해봐야 입만 아플 뿐이다. 당장 이득을 봐야하는 한국인의 속도에 맞지 않을 뿐더러 이미 돈 맛을 봐버린 사람들이 이를 포기할 리 만무하다.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어느 나라나 부동산 개발은 필요하고 투자 가치로서 공간 산업이 발전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단순히 금전적 이익만을 쫓을게 아니라 공공성을 충분히 배려한 균형 잡힌 접근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제도와 법률로서 이를 제어해야 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런 시각이 당연한 가치관으로 바뀌는 풍토를 만들어내야 한다. 모두를 위한 공공 공간은 항상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있다. 땅이 잘 팔려야만 신도시 계획이 성공적으로 끝나는 것일까? 좋은 자리는 상가와 주거(아파트)가 차지하고 남은 자투리 같은 곳에 공원이나 문화시설이 들어선다. 거대한 아파트 단지는 도시를 잘라먹고 사람과 사람사이를 단절 시킨다. 도시의 보행로는 오늘도 자전거 도로와 그 좁은 폭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의 부동산 광풍은 언젠가는 폭탄으로 돌아올 것이다. 뻔한 얘기겠지만 중독을 극복하는 방법은 고통을 참고 이겨내는 방법 뿐이다. 조금씩이라도 사회에 건강한 공간 문화가 싹 틀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렇게 담론만을 성찰해 보면 어디부터 바꾸어야 할 지 아득하기만 하다. 이 십년 가까이 이 업종에서 일해오며 느낀 점은 이 막막함이다. 우리는 적절치 않은 시기에 태어난 건축가들 일지도 모르겠다. 긍정적으로 보면 시간이 흘러 언젠가는 점진적으로 바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현재를 살아야 하는 우리는 이 저항에 맞서는 일종의 의무(?)내지는 소명 의식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한 줄 남은 자존심마져 무너질 수 있다는 어쩌면 강박감같은 것 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대한민국의 건축 산업 문화에서 디테일이 갖는 의미를 그런 마지막 남은 한 움큼의 자존감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은 지점을 포기하느냐 아니면 끝까지 관철시키느냐의 태도가 21세기 대한민국의 건축가라는 이름을 스스로 되뇌일 수 있느냐 혹은 그럴 자격이 없느냐를 가름짓는 잣대라고 스스로 규정지었다. 우리는 공간의 수준이 더 깊은 바닥으로 치닫는 일을 막아내는 마지노선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포장하고 나니 뭔가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비춰질지도 모르지만, 돈 못벌고 배고프고 무시당하기 일쑤인 우리가 이렇게라도 자기최면(?)을 걸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필드이기도 하다.
일본은 프리츠커상 수상자를 여덟 명(*횟수는 7회)이나 배출한 나라이다. 단일 국가로는 미국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상자를 보유하고 있다. 쉽게 얘기해 세계에서 공간 문화의 수준이 가장 높은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말하는 프리츠커상 수상자가 발표될 때마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단 한명의 수상자도 나오지 않는가?"는 식의 비판이 쏟아진다. 이 사태에 건축가의 책임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과연 건축가들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