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공동주택
우리는 공동주택에 수납되어 있다. 이렇게 된 사연을 살피자면 잠깐 산업혁명 시대의 유럽 이야기를 해야 한다. 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속속 도시로 몰려들었다. 떠밀리듯 도시 노동자가 된 이들에게는 돈이 없었다. 따라서 도시의 주거 공간은 빨리 지을 수 있는 구조, 다수를 한꺼번에 수용하는 형태로 만들어져 싼값에 제공되었다. 이러한 공간의 위생 상태는 무척이나 열악했다. 공동주택 밀집 지역이 전염병의 근원지가 된다는 점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라 위생 개혁 운동이 일어났을 정도였다. 최초의 공동주택 거주자들은 급조된 데다 비인간적인 시스템의 피해자였던 셈이다.
국내 최초의 아파트는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대에 건설되었다. 같은 시기에 ‘아파트’라는 단어가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병참기지로 삼기 위해 식민지 공업화를 한창 전개하던 무렵의 일이다. 그때 만들어진 공동주택은 우리가 생각하는 아파트와 다소 거리가 있다. 대부분이 노동자용 주거 시설이었고 일부는 큰길가에 부대 편의 시설을 갖춘 형태였다.
세월이 지나 6.25가 휴전으로 마무리된 뒤 정부와 민간 업체들은 서울에 소규모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1956년에는 한미재단이 종로구 행촌동에 아파트 48세대와 연립주택 52세대로 구성된 주택단지를 조성했고, 1958년에는 중앙산업이 성북구 종암동에 종암아파트를 건설했다. 대중은 새로운 주거 시설을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마당도 없는 집에 어찌 사느냐’라는 말이 나왔으니 당대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공동주택은 어디까지나 임시 거처라는 인식이 보편적이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선택지
그로부터 15년 동안, 서울에는 하루 평균 894명이 이주해 왔다. 이들 모두에게 집을 제공하려면 매일 224동의 주택을 새로 지어야 했다.(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폭발적인 인구 증가를 예측하지 못한 대가는 혹독했다. 1960년대 내내 심각한 주거난이 이어졌다. 마당도 없는 공동주택은 어느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선택지로 자리를 잡아 갔다.
1960년 말에 이르자 서울시의 도시계획에 아파트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불도저 시장이라고 불렸던 김현옥 서울시장은 판자촌을 허물고 시민아파트를 지었다. 3년 안에 아파트 2000동을 건설해 판잣집에 살던 9만 세대를 입주시킨다는 계획 아래 추진한 사업이었다. 이 야심 찬 사업은 1970년 와우시민아파트가 부실 공사로 인해 붕괴되면서 막을 내리고 만다. 건축 기술과 제반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았던 시절에 무리한 목표를 세운 시점에서 이미 비극적인 결말은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초기 공동 주거 단지의 실상
판잣집에서 살던 대부분의 주민은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일대로 강제 이주되었다. 서울시는 대규모 주거 단지를 마련했다며 해당 지역을 분양했지만, 그곳은 도로는 물론이고 상하수도 시설조차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14만 명에 이르는 이주민들이 집 대신 받은 것은 군용 텐트였다. 서울시는 일자리를 제공하겠다는 약속 또한 지키지 않았다. 마땅한 교통편이 없었기에 일터를 찾으러 외부로 나가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주민들의 삶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고건 전 국무총리의 회고록에 따르면 배가 고파서 아기를 삶아 먹었다는 풍문이 돌 정도로 참혹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생사의 기로에 선 사람들에게 정부는 처음 제시했던 땅값의 4~8배에 이르는 금액을 요구했다. 자체 재원만으로는 주거 단지 건립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던 서울시 측이 필요한 비용의 대부분을 이주민이 부담하도록 떠넘긴 탓이었다. 격분한 이들은 결국 1971년 8월 10일 대규모 봉기에 나섰다. 분양가를 내리고 취업 대책을 마련해 생계를 보장하라는 시위대의 요구를 전부 수용하겠다고 밝힌 서울시장은 이주민 단지를 시(市)로 승격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도시가 지금의 성남시다.
현재는 성남시 중원구와 수정구에 속해 있는 옛 이주 단지 지역에 가 보면 가파른 언덕길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소규모 공동주택을 쉽게 볼 수 있다. 판자촌 이주민들의 고통 위에 세워진 집들이다. 분당 신도시라는 번듯한 분칠을 했을지언정, 최초의 성남시민들이 국가 발전이라는 명분 아래 이루어진 잘못된 개발 정책 때문에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는 역사적 사실을 가릴 수는 없다.
정부가 잘못 끼운 첫 단추
와우시민아파트 붕괴 사고와 8.10 성남 항쟁(광주 대단지 사건)이 벌어진 뒤로 서민을 대상으로 한 소형 아파트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용산과 강남 등에 중산층을 위한 주택 단지가 들어섰고 이후 아파트 대량 공급의 시대가 도래했다.(박철수, 《한국 주택 유전자》) 우리는 바로 이 시기가 우리나라 특유의 ‘아파트 현상’이 시작된 시점이라고 본다.
주거 공급 정책의 초점이 서민에서 중산층으로 바뀐 배경으로는 여러 가지를 짚을 수 있지만 대외 선전에 이용하려는 의도가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남한과 북한은 서로를 견제하며 체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남한 정부는 경제 개발에 강한 의지를 보였고 아파트는 이를 드러내 보일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1970년, 서울 용산 동부이촌동에 한강맨션아파트가 들어섰다. 본디 고급 저택을 일컫는 말인 ‘맨션’(mansion)을 아파트 이름에 붙인 첫 사례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중산층 이상에게 분양하고자 건설한 이 아파트는 최대 55평형에 이르는 넓은 면적을 자랑했다. 입주자들 중 몇몇은 수입 명품 등의 사치품으로 집 안을 도배했다. 백화점에서 ‘맨션 사모님’만을 위한 특별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했다. 과소비를 조장하는 호화 아파트라는 비판이 언론에 여러 차례 오르내렸다.(박철수, 《한국 주택 유전자》) 아파트는 시기의 대상이자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주거 시설에 따라 사회적 계층을 가르는 풍조가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대한주택공사가 진행한 한강맨션아파트 건설 사업은 기존의 공동주택 사업과는 확연히 다른 색채를 띠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아파트는 서민에게 주택을 공급하고자 공공 자금을 들여 만드는 시설이었다. 중산층을 위한 아파트에 공적인 비용을 쓴다면 대한주택공사를 향해 비난의 화살이 쏟아질 터였다. 타개책은 선분양이었다. 1970년 즈음에는 선분양이 낯선 방식이었기 때문에 대한주택공사는 국내 최초의 견본 주택(모델하우스)을 지어 홍보에 나섰다. 전 세대 분양이 성공리에 완료되었기에 건설비는 예비 입주자가 지불한 선납금으로 충당했다.
한강맨션아파트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여럿 붙어 있는데, 프리미엄(웃돈)이 붙은 최초의 아파트 또한 이곳이다. 분양이 끝났음에도 분양권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이어지더니 입주 시점에는 분양가의 10~15%에 해당하는 프리미엄이 더해진 금액으로 거래되었다. 아파트는 욕망을 투영하는 재화가 되었고 경쟁적으로 사고파는 상품이 되었다. 주거 공간은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건축물이라는 대전제는 처음부터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50여 년 전 정부가 그릇된 판단으로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결과 우리는 아파트를 향한 뒤틀린 열망에 잠식된 채 살아가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경제적 풍요의 증표가 된 아파트
대한주택공사는 뒤이어 건설한 여의도 시범아파트와 반포 주공아파트 1단지에도 고급화 전략을 적용했다. 전자는 국내 최초의 단지형 고층 아파트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후자는 99동 3700여 가구에 이르는 국내 최초의 대단지 아파트다. 이 중 60개 가구는 30평 면적의 2개 층을 사용하는 복층 구조를 갖추고 있다. 큰 규모가 곧 풍요로움이라고 착각하기 쉬웠던 시대의 산물이다.
국민 대부분이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어 했다. 재화의 축적은 ‘잘살아 보세’를 부르짖는 사회에서 추구해야 마땅한 최우선 목표였다. 그 목표를 이뤘음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존재가 아파트였다. 고급 주택을 의미하는 ‘맨션’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아파트에서 산다는 말만으로도 부러움이 담긴 시선을 받기에는 충분했다.
1980년대 서울에 새로 조성된 신시가지와 1990년대 수도권에 마련된 1기 신도시는 모두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채워졌다. 늘어나는 인구와 높아지는 주택 가격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고층 아파트가 줄지어 늘어선 모습은 어느덧 사람들 눈에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이후 아파트 주변에 있던 시설들이 하나둘 아파트 단지 안으로 위치를 옮기는 변화가 일어났다. 상가는 물론이고 놀이터와 수영장, 심지어 교회와 학교까지도 아파트 단지 내에 들어서게 되었다. 현재의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아파트 단지의 모습이 그렇게 완성되었다.
2023.02.24